영화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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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년 작품)를 볼 때는 이복동생(나는 이 단어가 참 웃긴다고 생각한다. 뭐랄까, 옛날 씨받이라는 이상한 단어가 돌아다닐 때의 느낌이랄까? 그러면서도 지금 이 단어를 쓰고 있으니 아이러니이다.)과 함께 살아가며 가족이 되어가는 이야기가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맑고 깊은 눈빛을 가진 아이 히로세 스즈가 웃음을 찾아갈 때, 나는 비로소 ‘가족’이라는 보금자리에 대해 생각했다. 아, 한영사전에서 ‘보금자리’라는 단어는 세 개의 영어 단어를 열어준다. home, nest, roost. 이중 내가 생각한 보금자리의 의미는 nest, 곧 ‘둥지’와 가까웠다. 스즈가 만난 건 둥지였다. 어린 새가 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공간, 그 둥지 말이다. ‘홈(home)’ 역시 그런 의미이겠지만 왠지 생명이라는 절박함이 느껴지지 않아서 꺼려진다. 홈이 없어도 생명이 자라는 데 큰 지장 없어 보이지만 둥지는 없어선 안 될 생명의 보금자리 같아서이다. 히로카즈 감독은 자신의 작품들 속에서 언제나 ‘가족’이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걸어도 걸어도>(2008년 작품)에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아들 료타가 아버지를 알아가는 과정을, <태풍이 지나가고>(2016년 작품)에서는 대기만성 형 아빠 료타가 가족의 중요성을 알기 위해 겪어야 했던 태풍 같은 나날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년 작품)에선 성공한 비즈니스맨 료타가 아버지의 조건은 ‘피’가 아니라 ‘사랑’임을 배워가는 과정을 그렸다. 히로카즈 감독은 그리고 올해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어느 가족>(2018년 작품)에서 완전 ‘무자격(?)’ 아빠 오사무를 내세우고 다시 질문한다. 그렇다면 이런 아빠는?



이렇게 대답해버리면 편하겠지만 그렇게만 정리하고 넘어가기엔 찝찝한 무엇이 있다. 아니, 우리가 알고 있는 진짜 아빠들조차 갖지 못한 어떤 것을 가진 아빠이기 때문이다. 그게 뭔데? 글쎄!

<어느 가족>의 원제는 ‘만비키 가족(万引き家族, 좀도둑 가족)’이다. 아빠 오사무는 아들에게, 그리고 새로 생긴 딸에게까지 이 가족의 수식어 같은 ‘좀도둑질’을 가르친다. 아비라는 사람이 자식에게 도둑질을 가르쳐도 될까? 오사무는 그 이유조차 어이없이 말한다(영화관에서 그 어이없는 이유를 직접 들어보시길).

학교도 보내지 않는다. 학교는 집에서 공부를 할 수 없는 아이들이 가는 곳이란다. 나 참. 아빠 오사무는 아들이든 딸이든 직접 낳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내조차 ‘진짜 아내’가 아니다. 어머니도, 처제도 진짜가 아니다. 모든 게 다 가짜다. 그래서 ‘어느 가족’이란 곧 ‘가짜 가족’이다. 그런데 이 가짜 가족을 이루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상처들이 모두 놀랍게도 ‘진짜 가족’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 상처로 말미암아 ‘진짜 가족’을 떠나게 되고, 그 후에 흘러든 곳이 ‘가짜 가족’ 곧 ‘만비키 가족’이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황당하게도 여기서 ‘둥지’를 얻는다. 학교에 가지 않고, 마켓에서 도둑질을 하며, 유흥업소에서 일하며, 세탁공장에서 물건을 훔치며, 그렇게 살아가면서 그들이 입은 상처를 치유하고, 자신이 다쳐서라도 누군가를 사랑하며, 그리고 무엇보다 웃음을 되찾았다. 이렇게만 보면 가짜 안에 진짜가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진짜 속에서 잃어버린 것을 가짜 속에서 찾은 셈이다.

어떻게 찾았을까? 그 진짜라는 것을…. 다시 황당한 답일지 모르지만 그 까닭은 ‘진짜가 아니어서’일지 모른다. 그러니까 ‘진짜 가족’임에도 진짜를 잃어버리는 까닭은 ‘진짜’라는 그 조건들 때문인지 모른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낳은 엄마라야 진짜 엄마이고, 먹고 살도록 해주지 못하면 진짜 아빠가 아니고, 학교에 보내어 성적을 관리해주어야만 정상적인 부모이며, 도덕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순간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라고 내쳐질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하는, 그 모든 상식들을 포함하여 그 진짜의 조건들…. 이 진짜의 조건들이 갖는 함정들 때문에 우리는 어쩌면 ‘진짜’를 잃어버린 것인지 모른다.



‘형제’라는 단어를 성경 읽기 검색어로 넣어 보면 수많은 구절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많은 구절들 가운데 피가 섞인 형제는 오히려 그리 많지가 않다. 성경에선 적어도 ‘형제’의 조건이 같은 엄마와 아빠를 가져야 한다는 건 아니지 싶다. 자신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다. 당신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들, 그들을 ‘가족’으로 삼으신 분이 또한 하나님이다. 누구이든 내 형제일 수 있음을 알려주신 하나님이다.

그러고 보면 오래오래 전에는, 가족이란 의미도, 형제란 의미도, 아버지란 의미도 처음부터 그리 좁게만 사용되지는 않았을는지 모른다. 역사가 흐르면서 우리는 적어도 ‘가족’이란 개념에서만큼은 퇴화해 온 게 아닐까 의심해본다. 하여 이런 황당한 생각을 가져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어쩌면 수만 년 전 어느 세계로부터 타임머신을 타고 훌쩍 우리의 세계로 들어온 건 아닐까? 그의 눈으로 본 오늘의 가족이란 게 이해하려고 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묻고 또 묻는 게 아닐까?



영화 컬럼






제작

글 : 박명철 작가
사진제공 : 티캐스트
제작 : 사랑의교회 인터넷사역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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