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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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불편함

감기와 몸살로 고생하다 일감에 치여 잠까지 제대로 자지 못했다. 50석도 안 되는 소극장에 처박히듯 앉아야 한 까닭도 단지 의무감 때문이었다. 영화를 보고, 글을 써서 넘겨야 하는 상황이 원고마감 시각까지 질질 끌려 왔다. 게다가 그 많은 개봉작들 속에서 스크린 앞으로 나를 이끌어낼 매력을 가진 작품들조차 찾지 못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를 선택한 까닭은 그 많은 수상경력도 미끼 역할을 했지만, 먼저 영화를 접한 누군가의 평 한 구절에 낚인 측면도 있었다. ‘낚였다’는 표현은 속았다는 의미가 다분하지만 실은 그의 평은 영화를 보고 나서 한참이 지난 뒤에야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 특별한 평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영화가 마치고 난 후 결국 가장 두려운 것은, 우리 각자가 타인의 고통의 구경꾼이었음을 자각하게 되는 순간이다"(박석영 감독).

두 여성이 법원 복도를 한참 걸어가며 울리는 구두 소리, 법정의 문이 닫히고, 이어지는 가정법원의 심리상황. 음악의 사용이 거의 없는, 그래서 현장을 취재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변호사의 변론은 편집을 하지 않은 인터뷰 같아서 길고, 빠르고, 어렵다. 몸까지 피곤하여 집중할 수가 없으니 단어를 놓치고 의미를 놓치다 깜빡 졸고 말았다. 영화는 여전히 의도된 음악을 걷어내고 자동차의 경적음(내게 그 소리는 하도 현실적이어서 졸음이 달아날 정도였다), 전화의 벨소리, 초인종을 대신한 전기 벨소리, 문을 두드리는 소리, 심지어 우악스런 남자의 분노가 폭발하기 전의 거친 숨소리까지, 온갖 현실의 소리들로써 긴장감을 높여간다. 피로한 몸을 흔들어 깨우는 소리들이 나에게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요소들이다.

2.가족

‘앙투안’이라는 사내는 분노조절장애 환자이다. 큰 몸집에 웃음기 없는 표정, 분노로 가득 찬 행동거지들이 열한 살짜리 아들 줄리앙에겐 공포 그 자체이다. 아버지를, 그것도 나를 낳아준 아버지를 보면서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야 하는 상황을 나는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우리는 그런 아버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여 대개의 경우 ‘설마’ 하게 되고 어쩔 수 없이 ‘의붓아버지일 거야’ 하고 추측하게 되며 결국에는 ‘엄마라는 사람이 제 욕망에 눈이 어두워 새끼도 팽개친다’는 원망으로 이야기는 흘러가게 마련이었다.



이게 착각이란 걸 깨닫기까지 우리는 핏줄이라는, 오래된 환상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제 새끼인데 설마’라는 환상과 ‘다 네놈 잘 되라고 하는’ 착각 때문이었다. 이런 환상과 착각이 줄리앙 같은 피해자를 끊임없이 낳았던 것이고, 세상이 아무리 진보하더라도 여전히 양산하고 있다는 걸 경계해야 했다.



그렇다, 그 상황은 차라리 스릴러이고 호러이다. 전쟁에서 적은 사살해버리면 끝난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굴레에서 핏줄로 이어진, 지나칠 만큼 현실적인 이 관계는 그렇게 끊어버릴 수도 없는 치명적인 상황이다. 스릴러의 상황 그 자체이다. 가족이라는 단위는 그 경계가 너무 뚜렷해서 누군가 함부로 넘나들기조차 불편하다. 가족의 일은 가족의 문제일 뿐이라는 인식이 강한 사회일수록 그 사회는 보수적이다. 아프리카와 중동의 어느 사회에서 우리는 가족의 문제를 가족에게 맡겨둠으로써 어린아이들을 노예로 매매하거나 가족의 전통을 굴레 씌워 생명까지 함부로 하게 내버려둔다. 가족 ‘밖’에서 사람들은 그저 구경할 뿐이다. 국가조차 개입을 방기해버린, 그래서 어떤 가족은 괴물과 더불어 먹고 잠들고 생식한다. 아이들은 ‘누구나 그렇게 살아간다’고 생각하며 그 지옥의 시간을 견뎌낸다.

3.운명

"타고 난 팔자가 그런 걸 어떻게."

우리네 이야기들, 시대물이라면 거의 모든 이야기에서 이 문장은 빠지는 법이 없었다. 운명이라고 여겨야 했던 그 상황은 너무 강하고 높고 질겨서 감히 빠져나올 수 없는 굴레이고 감옥이었다. 아버지와 엄마라는 자격으로, 심지어 먹고살 것이나 배움의 기회조차 제공하지 못하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부모들조차 ‘내 새끼 내 맘 대로 하는데 네가 왜?’라며 감히 택도 없는 ‘권리’를 내세웠다. 그러나 어떤 세상에서는 그런 감옥의 실체를 결코 좌시하지 않는 슈퍼맨 같은 영웅들이 살고 있었다.



나는 인류가 오랫동안 지키고 가르쳐온 이야기들 속에서 언제나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좋았다. 사람들이 경전으로 읽고 의식과 법의 기준으로 여기는 성경에서도 나는 오히려 이렇게 고마운 정의의 사도를 만날 수 있었고, 사마천의 <사기>나 반고의 <한서>나 일연의 <삼국유사>나 심지어 헤로도토스의 <페르시아전쟁사>에서조차 빛나는 슈퍼맨들의 출현으로 통쾌했다. 아마도 내가 읽지 않은 물리학이나 의학 또는 수학의 오래된 이야기들 속에서도 그들은 빛나는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않을까 추측해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반짝이는 행복과 사랑을 위해 비록 희생할지라도 ‘운명’ 같은 굴레로써 생명을 억압하거나 꺾으려는 어떤 힘에든 맞서 싸웠다. 전쟁으로 어린이와 여인과 노인들이 힘없이 죽거나 끌려갈 때 나의 영웅들은 하나같이 그 힘없고 연약한 우리들의 편에 서서 저항하고 함께 아파하고 때로는 함께 울어주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끝내 우리의 영웅으로 남았고, 역사는 그들의 땀과 피와 눈물을 기억하고자 노력했다.

백성을 하늘처럼 섬긴 사람들은 끝내 백성이 하늘이 되어 지켜주었고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로써 아이들에게 또 아이들의 아이들에게 전해주어 기록하고 기억하게 했다. 사람들은 그 소중한 가르침을 끝내 지키고 전하기 위해 하루를 특별히 구별하여 구세주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우리의 구원은 그 위대한 영웅의 다짐으로부터 출발하였음을 깨달았다. 성경에선 그 이름을 더욱이 ‘임마누엘’이라 불렀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을 가진 그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고, 아들의 ‘운명’을 우리와 공유하였다. 우리는 그렇게 구원에 이를 것이었다.

4.사랑 폭력

 ‘데이트 폭력’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 말이 몰아올 슬픈 세상의 구름을 보았다. ‘데이트 폭력’이란 말은 어쩌면 ‘사랑 폭력’이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으니까. 세상에 사랑이라는 단어와 폭력이라는 단어가 병렬하고 있다는 사실만큼 슬픈 게 또 있을까. ‘사랑 폭력’은 누군가의 개입을 차단하려는 악랄한 의도까지 엿보이고, 빠져나올 수 없는 늪 같아서 더욱 고통스럽다. 이 중압감이야말로 지독한 공포가 아닐까.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타이틀은 어쩌면 이 고통스런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한 듯해서 불편하다. 그 말은 마치 ‘과연 끝이 날까?’라는 절망적인 고문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앙투안의 폭력적 행동거지들이 ‘분노조절장애’라는 단어에 간단히 담겨서 깔끔하게 포장될 수 있을지 매우 의심스럽다. 그 말은 마치 아무리 악취 심한 오물이라도 밀폐된 비닐봉지에 담아 어딘가에 폐기해 버리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은 착각마저 생기게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천만에,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렇게 쉽지도 간단하지도 않은 문제이다. 인류가 수만 년을 지나오면서도 풀 수 없는, 지독한 문제이고, 그래서 과연 답은 있을까, 질문할 수밖에 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게 ‘사랑 폭력’이다. 이 선명한 두 단어가 병렬함으로써 우리는 기괴하기까지 한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그래서, 끝내 답이 없고, 끝이 없을 것 같아서 우리는 슈퍼맨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영화 컬럼






제작

글 : 박명철 작가
사진제공 : 판시네마
제작 : 사랑의교회 인터넷사역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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