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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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터슨(Paterson, 2016년, 미국 외, 짐 자무쉬 감독)은 아침 6시에서 6시 30분 사이에 잠에서 깬다. 그의 기상시각은 언제나 이 ‘30분’이라는 차이의 폭을 벗어나지 않는다. 어쩌면 이 좁은 시간의 폭이 패터슨의 일상에서 나타나는 변화의 폭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패터슨의 일상은 그 30분 정도의 범위 안에서 모든 것이 이뤄진다.

기상하여 옷을 입고, 시리얼을 먹고, 아내가 준비해 둔 도시락을 들고 출근하여, 버스기사로 하루의 근무시간을 성실하게 채운 뒤, 다시 아침에 출근한 그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오고, 남편을 기다리며 하루를 보낸 아내와 저녁식탁을 마주한 뒤, 강아지를 데리고 저녁 산책을 나간다. 그리고 동네의 작은 바에 들러 맥주 한 잔을 마신 뒤 돌아와 잠자리에 든다. 그렇게 패터슨의 하루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제자리를 도는 것 같다.



젊었을 때, 나는 그런 변화 없는 일상에 대해 조롱한 기억이 있다. 나 자신이 그런 일상을 보내지 않기를 바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의 직업은 매일 다르고 또 특별한 만남이 이어졌다. 그런 만남은 새로운 국면을 예고해주었고, 나의 일상은 오늘과 내일을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다이내믹했다. 그리고 나는 자신의 이런 폭 넓은 일상의 변화에 대해 높은 점수를 매겼다. 자고 일어나면 뭔가 깜짝 놀랄 일들이 일어나고 퇴근한 후에도 나의 일상은 새로운 만남과 국면을 만들어냈다. 나의 스케줄은 늘 물샐 틈 없이 바쁘게 약속과 약속으로 이어져 있었으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쓰러지듯 잠자리에 들었을 때, 비로소 만족할 수 있었다.

수년 전 나는 20년 넘게 이어진 다이내믹한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프리랜서 작가로 새 삶을 시작했다. 이제 나에게는 좁은 작업공간에 앉아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일이 거의 전부가 되었다. 가끔 외출하였으나 일주일에 한두 번에 그쳤다. 늘 같은 공간에서 하루, 한 달, 한 해, 아니 몇 해를 보냈다. 전화기에 저장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떨어진 채 섬처럼 홀로 있었다.

새벽이 오고, 해가 솟고, 그 해가 이쪽 창에서 저쪽 창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때로는 점심과 저녁을 거른 채 자리를 지키기도 했다.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아침의 햇살과 정오의 햇살, 해질녘의 햇살이 제각각 다른 질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하물며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햇살이야 말할 나위 없었다. 때로는 빗소리의 변화만으로 창 밖의 풍경이 그려졌다. 바람이 불거나, 승용차 버스 트럭이 오가거나,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걸음이 눈에 선하였다. 그 민감한 촉이 내 몸에 오롯이 새겨지고 느낌은 마음으로 전달되었다. 그 무렵에 본 드라마나 영화, 읽은 책, 들은 음악 등에선 그 민감한 감수성 때문인지 무엇 하나 민숭민숭한 것이 없었다. 오돌 도돌 소름이 돋듯 내 몸을 깨우고 정신을 흔들었다. 그리고 때로는 어디론가 영적인 문들이 열리는 듯 신비한 시간이 찾아오기도 했다. 나는 가난하였으나 충만하였다.

패터슨은 그 미세한 변화의 시간을 살아가며 일상이 들려주는 미세한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인이다. 그의 시는 거기서 태어나고 자라고 익어간다. 작고 보잘것없는 성냥갑 하나에서 찬란한 인생의 불꽃이 피어나고, 이웃과 나눈 대화 한 조각도 버릴 수 없는 시어들이다.

패터슨은 그 미세한 변화의 시간을 살아가며 일상이 들려주는 미세한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인이다. 그의 시는 거기서 태어나고 자라고 익어간다. 작고 보잘것없는 성냥갑 하나에서 찬란한 인생의 불꽃이 피어나고, 이웃과 나눈 대화 한 조각도 버릴 수 없는 시어들이다.

패터슨의 시는 오늘과 여기와 나를 버무려 차려내는 식탁이다. 30분의 작은 흔들림, 어쩌면 긴 시간의 거리에서 보자면 눈에 띄지도 않을 좁디좁은 그 존재의 공간을 우주처럼 확장하여 누리는 자의 축복이랄까? 패터슨은 일상으로 시를 쓰며, 자신의 삶으로 세상을 보고, 오늘을 읽고, 또 먼 곳을 응시한다. 나는 패터슨의 응시에 공감한다. 그의 시어들이 햇살처럼 눈부시거나 빗소리처럼 통통 거리를 튀어 오르며 리듬을 만들어낼 때, 고맙게도 나는 공감한다. 그는 틀림없이 30분이라는 그 비좁은 시간의 틈 속에서 다른 이들이 누릴 수 없는 우주의 풍요와 광활함을 맛볼 것이다. 마치 내 눈이 뷰파인더를 보듯 영화는 패터슨의 그 풍요함을 놓치지 않는다. 날마다 같은 침대에서 아내와 함께 맞는 아침이지만 아내를 향한 패터슨의 애정은 다른 질감에, 다른 폭에, 다른 깊이를 지니고 있다. 마치 아내가 준비해준 도시락의 겉모양이 언제나 한결같음에도 그 속은 날마다 다른 메뉴에 다른 메시지로 아기자기한 것처럼.

마찬가지로 패터슨이 출근하고 퇴근하는 그 길조차 오늘은 어제와 다른, 새로운 바람과 공기가 나부끼고, 같은 동료가 같은 시간에 같은 목소리의 불만을 이야기하지만 그 내용은 뚱뚱해졌다가 홀쭉해지고 그러다가 창백해진다. 하물며 버스에 오르내리는 이들이 전해주는 천태만상의 세상사야 말해 무엇할까. 가끔 일어나는 버스의 고장, 퇴근길에 만난 낯선 시인의 특별한 시 한 편, 한결같은 아내의 같고도 다른 삶의 몸부림, 이웃들이 살아가는 삶의 이런저런 햇살과 그늘…. 패터슨의 일상은 그렇게도 다이내믹하고 드라마틱한 것을.

영화 컬럼




뉴질랜드에 이민 간 선배가 자랑하듯 말했다.

“거기선 정전이 되어도 사람들이 그러려니 해. 우리나라처럼 다음 날 신문에 나거나 호들갑 떨지도 않고. 눈이 와서 길이 끊어져도 마찬가지야. 사람들은 퇴근하면 누구나 집으로 향하지. 커피 값이나 외식비로 큰돈이 들지 않으니 적은 월급으로도 풍요로워. 공휴일이 되면 스포츠클럽에 나가서 축구도 하고 야구도 해. 가족들이 함께 움직이지. 한국에서는 찾을 수 없던 즐거움이지.”

아마 선배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그런 데서 어떻게 살아요? 답답할 텐데” 하고 대답했던 것 같다. 나는 틀림없이 선배가 발견한 ‘한국에서 찾을 수 없던’ 그 즐거움을 공감하지 못한 셈이었다. 나로서는 일상이 변화무쌍하다든가, 물리적인 활동의 폭이 더 크다든가, 더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도시일수록 즐거움이든 보람이든 심지어 가치조차 더욱 클 것이라고 미리 선입관을 가진 게 아니었을까. 어쩌면 이런 선입관은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큰 것이 아름답다’는 오래된 착각에서 벗어나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발견에 이르기까지는 많고 다양한 시간의 사색과 경험이 필요한 것처럼 이런 선입관을 내려놓기까지도 그만큼의 거리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어쨌든 패터슨은 아마도 여기서 내가 찾을 수 없는 그 즐거움을, 그와는 비교적 먼 거리를 떨어져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야기해주는 듯하다.

어쨌든 패터슨은 아마도 여기서 내가 찾을 수 없는 그 즐거움을, 그와는 비교적 먼 거리를 떨어져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야기해주는 듯하다. 그의 이야기는 꽤 매력적이다. 그만큼 나 또한 지금 이곳의 삶에 대해 고개 갸웃거리고 있는 셈이라고 보면 되겠지. 또 더 많은 사람들이 패터슨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뉴질랜드 선배가 찾은 그 즐거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겠지. 아니 그건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그러나 다시 찾아야 할, 그래서 ‘오래된 미래’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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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명철 작가
제작 : GOD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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