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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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향녀

옥분은 열세 살, 그러니까 육 학년 어린이 나이에 일본 군대의 ‘위안소’에 끌려가서 ‘위안부’ 아니 ‘성노예’로 살았다.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날마다 짐승 같은 것들의 폭력을 받아내며 어린 옥분은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살았다. 전쟁이 끝나고, 그렇게라도 살아서 돌아온 고향인데, 그 고생을 하고 겨우 살아온 딸에게 엄마라는 사람은 ‘아무 말 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며 다짐을 두었다. 딸을 위한 다짐인지, 옥분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을 위한 다짐인지, 알 수 없었다. 어찌 들으면 엄마의 말은 ‘차라리 죽지 왜 살아 돌아왔느냐’ 타박하는 듯도 했다. 누군가는 말했다. 사백 년 전 청나라에 끌려갔다 겨우 살아서 고향 땅에 돌아온 여인네들, 환향녀(還鄕女)들의 울분이 죽지 않고 살아서 떠도는 것이라고.

그 뒤로 옥분의 입은 닫혔다. 속에서 꿈틀대는 말들을 누르고 또 눌렀다. 많은 세월이 흘러서 이제는 말해야 할 때라고 세상이 멍석을 깔아주었으나 옥분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오랜 세월 누르고 눌러온 그 말들은 어느새 남의 나라 말처럼 낯설어졌다. 더 이상 내 입으로는 못 할 말이 되어버린, 생소한 그 말들은, 그러나 삭거나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세월이 갈수록 몸속에서 입안에서 들썩댔다. 솟구치는 그 말의 주먹이 또 다른 옥분의 열정이 되어서 밤낮 없이 몸 밖으로 튀어나왔다. 함께 살아가야 할 세상을 흠집 내는 ‘범죄’를 보면 아무리 작은 것도 용서하지 못하고 구청을 드나들며 민원을 넣거나 고발했다. 남들에게는 수상하게 보이는 옥분의 그런 행동들이야말로 어찌 보면 그녀의 ‘말’이었던 셈이다. 그녀는 이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불법을 깨닫게 해주었으나 사람들은 그녀의 말이 오히려 불편하기만 했다. 여전히 그녀는 사람들에게 불편한 존재일 뿐이었다



#증언



지옥 같은 세월을 함께 살다 돌아온 친구 정심이는 작심하고 영어를 공부했다. 정심은 옥분에게 말했다.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해서 미국 사람들에게 그녀가 겪은 잔인한 세상을 이야기할 것이라고. 그리하여 온 세상에 일본 놈들이 저지른 만행을 고발할 것이라고. 옥분이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 그때쯤이었을 것이다. 왜 뒤늦게 영어 공부를 하느냐고 물으면 다른 사람에게는, 아니 자신에게조차 미국으로 입양 간 아우를 만나기 위해서라고 이유를 말했다.

그러나 단지 그 이유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옥분의 영어 공부는 무섭고 독했다. 단어들을 벽에 가득 붙여두고 젊은이들이 눈치를 주어도 괘념하지 않았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독한 영어 공부를 했을까. 친구 정심이가 치매로 정신이 오락가락 하다가 끝내 정신줄을 놓아버렸을 때 옥분은 비로소 깨달았다. 정심이가 말하지 못하면 내가 말할 수밖에 없다는 의무감, 그 책임감이 옥분에게 그토록 독한 영어 공부를 시켰다는 사실을.



영화 컬럼

#아이 캔 스피크

 2007년 2월 15일, 미국 하원에서는 공개청문회가 열렸다. 증인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김군자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수십만 명이 강제로 동원된 일본군 위안소 위안부들의 실태와 야만적인 일본 군대의 범죄를 증언했다. 이 증언들을 기반으로 미국 하원은 같은 해 6월 26일 일본 정부를 향해 그들이 강제로 동원한 위안부들에게 사죄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HR121) 채택에 이르렀다.

이는 일본의 위안부 강제 동원 실상을 국제사회가 처음으로 인정하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일본계 미국인 마이클 혼다 하원 의원이 중심이 되어 결의안을 제출한 지 10년이 흘러서 비로소 이룬 결실이었다. 그만큼 역사는 덮고자 하는 힘과 드러내고자 하는 힘이 고통스럽게 길항(拮抗)하고 있었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이 무거운 사실을 드러내고자 제목에서, 스토리에서 힘이란 힘은 모조리 빼고 가벼움을 유지해온 셈이었다. 이는 김현석 감독의 다른 영화들 이나 <스카우트>의 역사 말하기 방식과 다르지 않다. 그러고 나서 영화는 미국 입국 심사를 받는 옥분의 한 마디를 끝으로 경쾌하게 빠져나온다.


"Can you speak English?"
"I can speak."


옥분이 “아이 캔 스피크”라고 말할 때, 실은 이 문장의 생략된 목적어 속에다 모든 주제들을 감춰놓은 듯하다. 옥분의 입을 닫게 만든 억누름들이 사라져버린 뒤의 해맑은 표정까지도. 누군가를 억압하고 말하지 못하게 막는 세상이야말로 지옥과 다름없다. 그러므로 역사를 바로 세운다는 것은 말하지 못한 채 사라져간 사람들, 그들의 억울한 사연들을 드러내어 이제는 말할 수 있게 해주는 일인지 모른다.

그것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는 일이기도 하다. 말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억울함을 모른 채 하지 않는 것, 말할 용기를 갖도록 옆에 서주거나 응원하는 일, 그래서 한 사람의 지옥 같은 삶을 공감하는 일…, 이웃이란 바로 그런 사람일 테니까. 그래서 한 사람의 지옥이 모든 사람의 지옥이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지옥을 살아가는 한 사람을 우리의 주인공으로 삼을 수 있을 때, 아마 하나님의 나라는 비로소 이 땅에서도 하늘에서처럼 이루어질 것이다.

영화 컬럼





제작

글 : 박명철 작가
제작 : GOD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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