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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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에 왜구의 침략을 받아 7년 전쟁을 치른 조선은 피폐할 대로 피폐했다. 조정은 왜구를 무찌른 공을 대명(大明)의 은덕으로 돌리면서 수군을 이끈 충무공의 공적과 각지에서 일어선 의병들의 희생을 상대적으로 깎아 내리려 했다. 광해의 등극으로 조정이 숨통을 틀 것 같았으나 기득권 노론 세력은 다시 인조를 내세워 그들의 지배를 이어갔다. 노론 세력에 빌붙어 왕위에 오른 인조는 명 황제의 신하로서 배명(拜明)의 길을 갈 수 없었고, 새로이 동아시아의 강자로 부상한 여진족의 청(淸)에 맞서 전쟁을 치러야 할 운명이었다. 정묘년과 병자년의 호란(胡亂)은 그래서 이미 예정된 참화였다. 하여 당시 조정을 이끌었던 척화론, 곧 오랑캐에 맞서 모두가 죽어서라도 의로워야 한다는 주장은 그 참화의 토대를 이룬 생각이었다.





군신의 관계를 요구하며 쳐들어 온 청(淸)의 군대에 쫓겨 궁을 버리고 다시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조정은 이제 두 개의 길만이 남아 있었다. 죽어서 사는 길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살아서 죽는 길을 택할 것인가? 척화(斥和)와 주화(主和)로 갈라진 이 길의 의미는, 전자는 사대부로서 의로운 죽음을 선택하는 길이었고, 후자는 비루하지만 삶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의로운 죽음은 떳떳하되 미래를 기약할 수 없고, 비루한 삶은 고통스럽더라도 앞이 열려 있었으니 실은 어느 길도 절대 옳고 절대 그르지 않았다. 누구에게는 이 길이 옳으나 누구에게는 그 길이 절대 가선 안 될 길일 뿐이었다.

영화 <남한산성>은 1636년 병자호란,고립무원의 남한산성 속 조선의 운명이 걸린 가장 치열했던 47일간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화친으로써 후일을 도모하자는 주화파 최명길과 오랑캐에 맞서 싸워 대의를 지키자는 척화파 김상헌의 가파른 논쟁이 팽팽한 긴장을 자아내고, 다른 한편에선 조정의 대립이 어떠하든 그저 얼음이 녹고 민들레가 피기만을 기다리는 민중들의 지난한 시간들이 흘러가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명길이 쓴 항복문서를 상헌이 찢어버리자 명길이 다시 찢겨진 문서들을 주워 모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조정에는 이 문서를 찢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나처럼 주워 모으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명길과 상헌은 서로 다른 길을 주장했으나 서로 같은 마음을 품었음을 인정했던 것 같다. 그 마음이란 곧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이었다. 하여 두 사람의 주장은 다르면서도 같다. 그들은 서로 자신이 가고자 한 길을 간 셈이었다. 그 길을 가는 데 있어 책임을 면하고자 하지도 않았다. 상헌은 자결하고자 했고, 명길은 후대의 비판을 각오하였다. 그래서 철학자 도올이 영화를 본 뒤 남긴 글처럼 “역사에는 진보와 보수, 좌와 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상식과 몰상식만 있다”는 말, “척화는 선이고 주화는 악이라는 윤리적 이원론은 역사를 보는 잣대가 될 수 없다”는 말, “그래서 최명길의 입장 역시 상식일 뿐이었다”는 평가가 옳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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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리로써 사람을 선하고 악하다 말하기 좋아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왔다. 그러나 사람의 판단에 옳고 그름이 과연 있을까? 나는 오랫동안 이 물음을 대하여 답하지 못했다. 세월이 흐른 뒤에는 그때 옳은 것이 도리어 그른 것으로 판별이 되거나 그때 그른 것이 후에 옳은 것으로 드러나는 걸 하도 많이 보았다. 심지어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라고 단언한 일조차 뒤늦게 ‘천만의 말씀’으로 드러나는 것을 목격했다. 사람의 일이란 그런 것이다.

한 논객이 이런 말을 했는데 나는 온전히 공감했다. “나는 자유롭게 살고 싶다. 우리는 옳게 살려고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사실 무엇이 옳은지 모른다. 각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건 다를 수 있다. 확실한 진리를 근거로 사람을 통제하고 삶의 방식을 규제하고 강제할 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중세기 카톨릭교회가 그런 짓을 했을 때 마녀재판이니 십자군원정이니 하는 범죄들이 벌어졌고, 히틀러가 600만 명의 홀로코스트를, 스탈린으로 말미암아 수천 만 명이 죽어가지 않았는가. 이북의 김일성이 이런 체제를 구축해서 어떤 일이 일어 났는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어찌 보면 진정성을 가지고 살아갈 뿐이다. 삶이 향하는 길을 사람이 알지 못하기에, 인생은 오히려 하늘의 길에 가까운 게 아닐까. 먼 인생을 돌아보며 도무지 사람의 길 같지 않은 걸 깨달을 즈음, 우리는 비로소 알 수 없는 분의 개입에 대해 서늘한 소름이 돋음을 느낀다.

 그러면 무엇일까?그것은 어쩌면 사랑하는 일이라고 해야 할 지 모른다. 사람을 대하는 데 사람을 창조하신 분의 마음을 갖는 것이고 그 마음을 받들고자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이를 진정성이라 한다면, 세월이 지나고 모든 것이 낡고 부서져도 끝내 남는 것은 이것뿐이 아닐까. 사랑만이 영원하다는 말은 그러므로 진리이지 싶다.

예수님도 그리 말씀하실 뿐이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 (마태복음 22: 37~40)
그리고 어느 목사님의 말씀처럼 “그 사랑이란 것 또한 감정의 문제가 아닌 치열한 믿음의 문제여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인생의 길조차 품고서 알지 못하는 그 길로 나아가려는 소망”일 것이다.

영화 <남한산성>은 내게 이런 결론을 내리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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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명철 작가
제작 : GOD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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