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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운전사


하필이면 엄혹하던 군사독재시절에 대학생활을 한 사람들, 특히 유신헌법과 긴급조치시대를 살았던 1970년대 학번들의 경우 그들이 보낸 대학가는 마치 우리 사회의 ‘프런티어(frontier)’ 같았다.

거기서는 날마다 전쟁 같은 시간이 펼쳐지고 있었다. 독재정권은 온갖 폭력과 거짓수단을 공권력으로 가린 채 정권의 부조리에 저항하는 젊은이들을 간첩으로 내몰았다. 권력자들은 배고픈 민중들에게 경제성장이라는 당근을 내밀면서 뒤로는 젊은 영혼들의 미래를 총칼로 제압했다.

대학에 자식을 보내는 부모들은 자식들을 타일렀다. 부디 데모만큼은 하지 마라. 너는 우리 집 기둥이다. 네가 어떻게 되는 날엔 엄마 아버지 제삿날이다. 그러니 눈 닫고 귀 닫고 공부만 해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그렇게 간곡히 빌고 어르면서 대학에 보내야 했다.



그럼에도 수많은 대학생들은 불의 앞에서 저항하고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렀다. 또 한편에선 어쩔 수 없이 보고도 못 본 척하고 듣고도 못 들은 척했던 젊은이들이 있었다. 의로운 길을 선택한 이들에게는 더욱 가혹한 고통이 수반되었으나 그렇다고 양심의 소리를 억누르며 산다 하여 편하지도 않았다. 강약의 차이는 있더라도 이렇든 저렇든 괴롭기는 마찬가지여서, 적어도 대학이라는 지성의 공간에서 생각이란 걸 갖게 된 이들이라면 모두가 그늘을 한가득 얼굴에 안고 살아야 했다.

 '제주올레'를 연 서명숙 씨의 자전적 에세이 <영초언니>(문학동네 펴냄)는 바로 그때의 지옥 같은 시간을 기록했다. 대학에 들어가 독재정권의 거대한 악이 드리운 그늘을 이미 알아버린 주인공은 정권이 자행하는 폭력의 범위 안쪽으로 한 발작씩 접근해 간다. 그렇게 큰 다짐을 눈덩이 굴리듯 키워가다가 어느 날 문득 시장에서 가게를 하는 엄마의 고단하고 애절한 시간이 새삼 슬펐다.

추운 겨울날, 얼음 같은 찬물에 콩나물을 씻으며 장사를 하는 엄마의 두 손이 벌겋게 부풀어 오르는 걸 보는 순간 딸은 쇠뭉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다. "야학교사 노릇을 하면서 그토록 가슴 아파하고 연민했던 노동자들의 삶보다 한 치도 더 나을 게 없는 우리 엄마의 신산한 삶을 난 오랫동안 외면하거나 애써 모른 척했던 건 아닐까."(118쪽) 그리고 딸은 결심한다. 비겁해지기로.
그러나 주인공의 운명은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어느 날 알지도 못한 남자들에게 끌려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에서 갖은 고문을 받으며 권력의 입맛을 맞춰주었다. 1년 가까운 감옥살이를 하면서 아직 20대의 푸른 나이에 세상을 다 알아버린 늙은이처럼 초췌해져갔다. 하도 지긋지긋한 시간을 살다 나온 뒤로는 더 이상 그놈의 ‘의로운 짓’조차 지긋지긋해져 버렸다. 몸은 편했으나 마음은 여전히 천근만근 무거운 시간이 이어졌다.

영화평론가 허지웅 씨는 <택시운전사>를 본 뒤 이렇게 썼다.



영화 컬럼

 내가 본 <택시운전사>도 그러했다. 친구 집에서 월세를 살며 택시를 운전하는 만섭은 엄마 없이 자라는 초등학생 딸을 건사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더 벌어서 밀린 월세를 갚고, 딸이 그렇게도 신고 싶어 하는 구두 한 켤레를 사주어야 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데모 때문에 길이 막혀 벌이가 시원찮으면 데모하는 젊은이들을 나무랄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장거리 손님, 그것도 외국인의 광주행을 꿰찬 게 발단이 되어 1980년 5월의 그 ‘광주’ 속으로 들어간다.

세상은 이미 광주 안과 광주 밖으로 나눠진 뒤였다. 광주를 들고 나는 일은 마치 삼팔선을 넘나드는 것과 한가지로 위험천만했다. 최근에 드러난 미국 정부기관의 비밀문서에 따르면 당시 광주를 점령한 군 수뇌부들은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민간인들을 학살한 경험을 광주에 그대로 적용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눈에 광주시민은 국민이 아니라 적군이며 적군을 돕는 빨갱이나 같았다. 죄 없는 사람을 향해 조준사격을 해대고, 임신한 여성과 어린아이들까지 토끼몰이 하듯 뒤쫓아 가서 총을 쏘거나, 곤봉으로 때리고, 대검으로 찌르며, 불까지 지른 까닭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정작 시민들은 “대체 군인들이 우리한테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다”고 어리둥절해야 했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런데도 광주 밖의 국민들은 밥상머리에서 거짓 뉴스를 지켜보며 광주를 점령한 ‘폭도’와 ‘빨갱이들’을 우리 군인들이 소탕한다고 믿었다. 그 순간 국민들은 온통 한 통속이 되어서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광주’를 왕따시키고 있었다. 한순간에 폭도로 빨갱이로 내몰린 시민들은 억울한 심정을 어디 쏟아놓지 못해 속이 타들어갔다.



어떻게든 그를 통해 광주의 실상을 세상에 드러내고자 했다. 시민들은 한마음으로 그를 도왔다. 그의 카메라 렌즈가 광주의 현실을 보다 잘 담을 수 있도록, 그렇게 담은 필름이 광주와 대한민국을 벗어나 세계인들에게 방송되기를, 시민들은 간절하게 소원하면서 그 일에 목숨까지 던졌다. 이 광경을 지켜본 또 한 사람의 증인이 택시운전사 만섭이었다. 만섭의 눈에도 무엇이 의로운 일인지 또렷했다. 그는 살아남아서 독일인 기자를 태우고 다시 서울로 가야 했고 그의 양심은 쿵쾅쿵쾅 만섭을 설득했다. 하지만 그 선택은 목숨을 걸어야 할지 모른다. 자신이 어떻게 될 경우 홀로 남게 될 딸을 생각하면 의로움의 기준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만섭도 <영초언니>의 주인공처럼 다짐하고 만다. 비겁해지기로.

 그러나 만섭은 비겁해지기로 한 그 마음을 끝내 지키지 못했다. 비겁해지기엔 그가 만난 광주시민들의 억울함이 너무 무겁고도 짙었다. 만섭은 택시의 핸들을 돌리고 만다. 딸에게 전화를 걸어 “아빠가 손님을 두고 왔다”고 말할 때 만섭의 ‘손님’은 독일 기자가 아닌 자신의 ‘양심’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섭이 자신의 양심을 향하여 돌아서는 순간 세상을 어둡게 드리운 검은 악의 장막은 비로소 툭 실밥이 터지듯 찢어지기 시작했다.

성경에는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걸어온 길을 버리고 새 길을 걷게 되는 장면들을 소개해준다. 바울 사도에게는 유난히 그런 시간들이 많았다. 죽음의 면전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증언한 스데반도 그러했고, 예수님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순간 생업을 내려놓고 십자가로 향하는 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하셨다. 그리 보면 하나님의 영은 마치 죽음의 영처럼 두려운 어떤 존재 같기도 하다. 하나님의 영이 알려주는 하늘의 길은 용의 역린(逆鱗)을 만지는 것처럼 죽음이 예고되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영을 맞이한 이들은 그 길을 나아갔고, 그들이 간 길을 따라 역사는 비로소 진보하였다. 한 뼘씩 하늘의 진실이 드러났고, 그만큼 악은 물러났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복음이 온 땅에 전해진 뒤에야 내가 다시 올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의 진의는 어쩌면 그렇게 수많은 이들의 의로운 희생을 통해 하늘의 진실이 환히 드러나는, 그 머나 먼 때를 의미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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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보면 성경의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은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설득하고 경고하고 달래고 있는 것 같다. 두고 온 손님을 찾으러 지금 돌아서야 하지 않겠나, 라고.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그 길을 ‘제 정신’으로는 선택하지 못한 채 자기의 갈 길로 돌아간다.

“예수의 발길에 채이면 어쩔 수가 없어.”

함석헌 선생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군사독재시절 민주화운동을 하다 감옥에 간 이해동 목사는 독방에 갇혀서 성경을 읽다가 비로소 그 말의 진의를 깨달았다고 한다. 나는 한 번도 감옥에 올 생각도 하지 않았고, 감옥에 갈 일은 두려워서도 하지 못할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감옥에 와 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예수님의 발길에 채인 셈이었다.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말씀하신 예수의 고백이 바로 그 의미였다는 걸,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갈 수 없는 길이 두고 온 손님을 찾아 돌아가는 그 길인 듯하다. 오직 하늘의 영이 임할 때, 예수의 발길에 채여야만 갈 수 있는 길이지 싶다. 역사는 그렇게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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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명철 작가
제작 : GOD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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