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재학당

아직 7월 초 밖에 안됐는데 한여름 장마에 열대야까지 시작됐다.
전력난에도 에어컨바람을 찾아갈 수 없는 우리를 비양심적으로 만드는 무더운 날씨다.

여름의 거리는 보는 것 만으로도 뜨겁다.정동의 거리에 붉은 벽돌이 마치 붉은 레드카펫처럼 펼쳐져 있다. 정동교회를 나와 서소문로 붉은 길을
따라 걸으면 서울미술관 옆으로 배재학당 박물관이 나온다. 고갱전을 찾아온 서울미술관 인파를 뒤로하고, 나무들 사이로 소박한 풍경을 드리운
옛 교회와 학교건물들의 모습이 유독 여유로워 보인다.

낮지만 담담하게 시작

언제나 그대로

낮지만 담담하게

무더위를 피해 너도나도 들어가는 곳과는 또 다른 고색 창연한 서늘함이 언제나 있을 곳을 생각하니 발걸음은 나도 모르는 새에 그 서늘함을 쫓아간다. 주말이 얼마 안 남은 주중의 한 낮, 높은 빌딩 숲 한가운데 나지막이 자리하고 있는 한때 학교였던 곳으로 걸음은 바빠진다.
서울 한복판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은 분명, 엄청난 축복이다.

녹음이 푸르르다는 말로는 다 표현 못할 한 여름.
이 거리를 누가, 언제부터, 대체 왜 이렇게 만들어 놓았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하며 걷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높지도 않고, 보기만해도 반가운 잔디를 비롯한 소박한 녹음이 진 배재학당(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이 보인다.

배우고싶습니까
낮지만 담담하게

푸른 눈의 외국인 선교사는 경계했으나 새로운 학문은 기꺼이 받아들이는 조선의 열띤 학구열이 만들어낸 이곳은 배우고픈 사람들은 누구나, 신분의 고하와 부의 많고 적음을 떠나 정말 누구나 올 수 있었던 배움의 전당이었다. 배움에 목마른 수많은 서글픈 사람들이 이곳의 문을 두드렸고, 배움에 대한 갈증을 마음껏 해소했다.

조선 최초로 신분과 지체를 막론하고 모든 이를 학생으로 받아들였던 학교이자 ‘평등’과 ‘박애’를 앞세운 최초의 소위 미국식 교육 장소였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삶에 대해 동일한 권리를 받는다’라는 인식을 처음 접한 많은 젊은이들이 일제의 탄압이 잘못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배재학당이 마치 독립 운동가 양성소로 보일 만큼 적지 않은 독립 운동가들을 배출한 이유는 이 교육 목적에 있지 않았을까,
하는 골똘한 추측을 해보며 차례차례 발걸음을 옮긴다.

우리도 벼슬을 할수있습니까

시절을 잘 타 배재학당에서 영어를 배운 학생들이
조선의 문화 중흥기와 맞물려 정부 곳곳의 요직에서
관직을 맡게 되었다.

벼슬! 서민들에게는 뼛속까지 사무친 한이 풀리는 소식이요,
결코 오지 않을 것 같았던 그 날이 마침내 온 것이다.
교육의 기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무지렁이라고
무시 받고 천대 받았고, 배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대를 이어 눈치와 핍박 속에서 숨죽여 살아야 했던
한 많은 그들에게 벼슬의 기회가 다가왔다.

열심히 공부하면, 실력이 갖춰지면 제아무리 천한 신분도
관복을 입을 수 있다! 벼슬길에 나갈 수 있다!
이제 우리도 사람 대접을 받으며 살 수 있다!
조선을 향한 선교사의 사랑을 기초로 세워진 배재학당은
그 동안 말 못할 고통 속에서 신음했던 사람들의
눈물을 타고 전해지기 시작했다.












교육이 ‘필수’로 지정된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
잘살든 못살든, 공부가 좋든 싫든 어쨌든 학교는 반드시 가야 하는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 공부와 적성을 운운하며 살고 있는 우리들이 이 문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아야 할 지, 알 수 없는 부끄러움에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다.

나는 이곳을 사랑합니다

배움의 전당은 그 뿌리를 오롯이 가진 채 대한민국 곳곳으로 뻗어나갔고, 이곳은 역사의 한 자락이 되어 이곳을 스쳐가는 모든 이에게 그 옛날의 기억을 마치 어제 일처럼 들려준다.

이제는 역사가 되어버린 이 곳과 이 곳을 지나간 모든 사람들을 기억하노라고. 그리고 이곳을 사랑한 나 역시 역사의 일부가 되어버렸지만 모든 것을 예비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그 때도 그랬듯,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에 결코 역사로 남겨지지 않을 것이라고.

조선에 교회와 학교를 지은 아펜젤러 선교사는 숨듯이 예배 드리던 조선의 교인들이, 배우고 싶었으나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던 배움에 목말랐던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커다란 건물을 세웠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우리에게 던져준다.

생각지도 못한 때에 생각지도 못한 푸른 눈의 선교사가 조선에 옴으로 인해 변화된 많은 것들,
지금에서 보면 그것들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 그것이다.
예상치는 못했지만 결코 우연히 신분 차별 없는 학교가 세워질 수는 없다.
결코 우연히 조선 한복판에 교회가 생길 수는 없다. 결코 우연히, 한 순간에 조선에 예수를 믿는
인재들이 생길 수는 없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안다

조선을 사랑한 선교사가 이곳에 오기
이전 훨씬 전부터, 이곳을 사랑한 이가 있었음을.

이제는 역사를 기록하는 박물관이 되어버린
이 곳에서 역사 이전부터 시작된
깊숙한 사랑을 본다.

과거와 현재가 함께걷는길

과거와 현재가 함께 걷는길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드는 많은 생각에 내리쬐는
더위 아래서도 조용히, 아무 말이 없다.

잊혀졌지만 알고 보면 잊어서는 안 되었던 그 날들에 대한 오래된 잔상이 또렷하게 남는다. 이것은 기억도 안 날 지난 날에 대한 향수도,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오래 못 갈 시덥지 않은 다짐도 아니다.
오직 살아온 날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들에 대한 오래된 의문의 재발견이자 말없는 나 자신에게로의 외침이다.
뙤약볕 아래의 무더위가 조용히 잊혀진다.


글 : 강재은 작가 / 사진 : 유재호 작가 /
제작 : GOD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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