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러시아공사관 - 배임당한 그루터기일지라도

햇빛이 잠시 구름에 가려져 지나가던 늦은 오후, 바람과 길을 걷는다.
별볼 것 없는 계단을 걸어 올라 가까이 하늘을 보니 구름이 저만치 건물 꼭대기에 머물다가 이내 사라진다.
흐린 하늘과 같이 구러시아공사관의 건물을 바라보는 마음은 이렇다 할 것 없이 무덤덤하다.

처음 지어지던 때, 이곳은 정동 어디에서든지 쉽게 알아보고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겹겹이 자라난 수많은 나무와 건물에 싸여서 이제는 가까이 가지 않고는 모습을 볼 수도 없다.
한 세기 세월을 지낸 고적(古蹟)은 쉽게 그 형체를 드러내지 않고 숨어있는 듯 했다.

흘러간 시간과 함께 저만치 지나가버려서 멀리서는 보이지 않으니 가까이 와서 보라며…
오래 전 모습을 더듬어 기억해 볼 수 있는 모습으로 고치고 칠해져서, 계속 버티고 서 있는 듯하다.

뒷길로 걸어가다 시작

뒷길로 걸어가다

정동에 드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필요를 채우는 일보다
여유를만날 생각으로 찾아온다.

그렇게 찾은 사람들이 천천히 걷는 산책길 끝에 있다.


이 길은 또한
역사의 숨겨진 이야기를 밟아가듯이,


조용하게 정동으로 들어가는
뒷길처럼 숨겨져 있다.

이 좁은 길로 들어서서 여유를 찾는 이에게는,
생소하게 다가와 비밀의 관문처럼 느껴진다.

이곳의 지대는 정동에서도 가장 높다. 초가집 일색이었던 옛 도성의 중심에 크고 화려하게 솟은 백색의 건물은 대문부터 봐도 그 모양이 사뭇 이질적이었다.

창문의 모양도, 각진 벽과 지붕의 모양도 모든 것이 달랐다.
중절모에 우산을 쓰고 뾰족한 구두를 신은 양인들의 모습이 아직도 어색하던 한양 한복판에서 이곳은 무엇과, 누구와 어우르려 했을지.

그저 낮게 둘러놓은
울타리 안에서 홀로 조명을
받으며 도도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아관파천의 구름 밑에서

아관파천의 구름 밑에서
아관파천의 구름 밑에서 이미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외국의 모양들이 조선의 모양들 속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동경과 적대감을 동시에 받으며 세워져갔다.
정동의 가장 높은 곳에서 최대의 규모로 지어졌던 건물의 자취는 다 사라지고 사적 253호라는 표지판만 흔적을 지키며 간간이 사람들의 시선을 훑고 있다.

바람에 나부끼는 이파리들의 그림자가 문에 드리워지며 하루를 또 마무리하려 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어제와 같이 해가 지나가며 그림자 사이로 문을 비춰댄다. 그리고는 살짝, 살짝, 소리 없이 두드린다. 조선의 흥망이 이에 숨겨져 있었으니...... 문을 어루만지던 햇빛도 들어갈 곳을 찾지 못해 저물어 갔겠지.

1900년 2월 17일 알렉산드르 파블로프 공사관의 요청으로, 이곳 러시아공사관에서 한국정교회의 최초 성찬예배가 드려지게 된다. 3층탑에서 무너져가는 조선을 관망하고 있었을 고종의 회한은 어떠했을까? 저 위에서 바라보던 조선의 풍경이 전부는 아니었겠으나 헐벗은 아이들과 노인들이 구걸하고, 총과 칼이 줄을 지어 걸어가고, 양복과 드레스를 입은 서양인들의 발걸음을 바라보며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들에 한탄, 한 숨, 또 한탄이었을 것이다.

하늘은 저리도 파랗게 높아 있는데, 마음은 언제나 흐린 하늘이었을 것이다.


그루터기에 앉아서

그루터기에 앉아서

문 하나가 조심스럽게 나에게 말을 걸으려나 보다.
몸을 다 빼지 않고 반쯤 숨어서 고개만 내다보며 가까이 다가가지 못해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려 했던 여인의 처지가 문득 떠올랐다.

아마도 누구의 옷자락이라도 잡고 싶었을 것이다.
쉽게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을 것을.

계절도 잊고 날씨도 잊고 어제와 같은 오늘을 보내며 이 안에서
들꽃과 같이 견디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 앉아서 쉴 만도 한데 눈 길하나 줄만큼 여유도 없이 바쁜 사람들로 정동은 또 채워져 간다.

가지만 무성하게 말라있던 계절도 지나갔다.
역사도, 사람도,구름도 지나가고 모두 베임 당한 그루터기처럼만 남아있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그곳에서 거룩한 씨앗이 나서 꽃을 피우고 햇빛과 함께 자라간다. 그리고 앙상한 역사를 뒤로 한 채 곳곳에서 그 푸른 잎사귀를 빛내고 있다.

제작

글 : 김무진 작가 / 사진 : 유재호 작가 / 제작 : GOD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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