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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체에 나타나는 유사성들, 무엇을 말해주는가?(5)-하


진화론의 불굴의 의지..충수돌기는 최소 32차례 별도로 진화했다?

진화론의 불굴의 의지..충수돌기는 최소 32차례 별도로 진화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다윈에서 시작하여 150년 넘도록 이어져온 ‘충수돌기는 기능을 잃은 흔적기관’이라는 진화론적 주장에 대해 최근 많은 연구자들이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연구자들이 진화론적 입장을 포기하고 충수돌기를 창조론 또는 설계론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윈의 생각이 틀렸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충수돌기는 진화의 산물이라는 관점을 버리지는 않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앞서 소개한 미국 듀크대 의대 연구팀의 2013년 연구에서는, 조사된 361종의 포유동물 중 50종이 충수돌기를 갖고 있음을 확인했다. 다윈은 충수돌기가 영장류에만 있으며, 영장류 조상에서 인간으로의 진화 과정에서 식이습관이 변하면서 기능을 잃게 된 것이라고 했지만, 그의 주장이 완전히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는 결과였다. 그러나 연구팀은 다윈이 틀렸다고 해서 진화론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다윈의 가설 이외의 다른 진화론적 답을 찾기 위해, 그 50종 동물의 충수돌기들이 진화계통 나무에서 어떻게 연결되는지 배열해보고자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통상적인 진화계통과는 잘 맞지 않는 것이었고, 결국 그들은 “충수돌기는 최소한 32번 이상 각 동물에서 별도로 진화했다”는 이상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충수돌기는 공통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기관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조상, 즉 별도의 진화 계통들에서 독립적으로 발생된 기관이라고 해석하게 된 것이다. 이른바 수렴진화의 개념을 도입한 해석이었다.

이것은 1977년에 유명한 진화생물학자인 에른스트 마이어(Ernst Mayr)가 동물의 다양한 눈은 수십 차례의 수렴진화를 거쳐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한 것(von Salvini-Plawen L., and E. Mayr. 1977. “On the evolution of photoreceptors and eyes” Evolutionary Biology, 10: 207-263)과 버금가는 파격적인 해석이라 할 수 있다. 동물의 눈은 그 구조에 있어서 동물에 따라 고유의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때문에 무척추동물에서 척추동물로 이어지는 진화의 순서와 계통에 맞춰 눈의 진화를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다. 곤충 등의 절지동물들이 가진 겹눈 또는 홑눈을 척추동물이 가진 ‘카메라 눈’과 진화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특히 오징어 등의 두족류 연체동물의 눈이 사람의 눈과 같은 카메라 눈이며 그 구조 또한 서로 매우 유사하다는 점은 진화론의 공통 조상 개념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 중 하나라 할 수 있다(Godpia 웹진 - 톡톡 창조 이야기, “생물체에 나타나는 유사성들, 무엇을 말해주는가? [2-하]편 - 동물의 눈을 통해 본 상동성과 상사성의 딜레마”를 참조하기 바란다). 그래서 에른스트 마이어는 해석하기를, 동물의 눈은 진화 계통과는 무관하게 40~65번에 걸쳐 각각 독립적으로 진화한 것이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동물의 눈에 대한 이러한 진화론적 관점은 먹장어의 눈에 대한 해석에서도 나타난다. 일명 꼼장어라고도 불리는 먹장어는 피부밑에 묻혀있으면서 약한 빛만을 감지하는 미약한 눈을 가지고 있어서 마치 눈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진화론 학자들은 먹장어의 눈은 진화 과정에서 퇴화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이 먹장어는 척삭동물의 일종이어서 무척추동물보다 진화된 동물이다. 하지만 삼엽충, 곤충, 오징어, 문어 등 각각 독특하면서도 완벽한 눈을 자랑하는 동물들은 모두 무척추동물이다. 이들보다 더 진화된 동물인 먹장어가 오히려 저급한 눈을 가진다는 점 때문에 진화론에서는 동물의 눈을 설명하기 위해 수렴진화라는 대안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무척추동물에서 척추동물로 이어지는 진화의 순서와 무관하게 눈을 필요로 하는 적자생존의 환경에서 각 진화 계통별로 독립적으로 눈이 발생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동물 눈의 기원에 대한 객관적인 설명이라 할 수 없다. 진화론의 핵심 개념인 공통 조상으로 설명되지 않으면 다른 차선적인 개념을 적용해서라도 어찌 되었든 진화로 결론 맺으려 하는 일종의 변명과 같은 설명이라 하겠다. 그렇게 억지로 내리는 해석에는 당연히 논리적 타당성이 떨어지는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동물의 기관 중에서도 가장 복잡하고 정교하다는 눈이 단 한차례만 진화 발생하여 동물이 시력을 갖게 되는 것도 기적과 같은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수십 차례나 각각 독립적으로 일어나 여러 동물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시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지나친 상상이 아닐 수 없다. 충수돌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수십 종의 포유동물에서 발견된 충수돌기들이 같은 조상에서 물려받은 흔적기관이 아니라 각각 개별적으로 진화되어 비슷한 기관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새로운 진화 가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원래의 흔적기관 가설보다 확률이 높아 보이지도, 타당해 보이지도 않는다. 이는 충수돌기가 고유의 기능을 가짐을 발견한 상황에서 흔적기관의 개념은 적절치 않으니 대안적인 개별적 진화의 개념을 써서 어찌 되었든 진화라는 결론을 내리려는 노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충수돌기는 진화의 결과물’이어야 한다는 결론을 미리 정해놓고 그것만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고 고집하는 진화론의 본질적 속성을 보여주는 한 예라 할 수 있겠다.

퇴화도 진화과정 중의 한 방법이다?.. 진화를 지키기 위한 궤변

정리하자면 충수돌기는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인가에 대한 설명은 세 가지로 나뉜다. 우선 진화론 학자들의 주장들에는 두 가지의 서로 상반된 입장이 공존하고 있다. 하나는 흔적기관 가설, 즉 충수돌기의 상동성(공통 조상으로부터 온 유사성)을 내세우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앞에서 본 것처럼 흔적기관 가설을 반박하며 상사성(개별적 진화를 통해 만들어진 유사성)으로 설명하려는 입장이다. 반면, 창조론이나 설계론적 관점에서는 충수돌기가 고유의 독립적 기능을 갖는 설계된 기관이라고 설명한다. 즉, 흔적기관이 아닐 뿐만 아니라 상사성 기관도 아니라는 입장이다.

이러한 유신론적 관점에 대해, 흔적기관 개념을 고수하는 진화론 학자들은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하며 비판한다: 첫째로, 유신론자들이 ‘진화론은 흔적기관을 쓸모없는 기관으로 본다’고 문제 삼지만 그것은 진화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는 비판이다. 진화론에서는 흔적기관을 쓸모없는 기관이 아니라 원래의 기능을 잃어버린 것을 말하므로 문제 제기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로, 기능을 잃고 퇴화되는 것도 진화의 한 방법이 될 수 있으며 원래 기능을 상실함으로써 새로운 기능을 찾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충수돌기를 예로 든다면, 형태적으로 다른 하등 포유동물들의 것과 유사하게 생겼다는 것은 공통 조상의 증거이며 인간으로 진화하면서 식물 섬유소 소화 기능을 잃어버린 것뿐이기 때문에 흔적기관이 맞다고 말하는 것이다.

특히 위의 두 번째 주장, 즉 기능을 잃어버리는 퇴화 현상도 진화 과정 중의 한 방법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따져봐야 할 점이 많다. 이런 경우에 대한 예로 흔히 ‘장님 도롱뇽(blind salamander)’과 ‘동굴어(cave fish)’라는 두 가지 동물이 거론된다. 이들은 빛이 매우 약하거나 거의 없는 환경에서 사는 것들이다. 그런 만큼 이들은 제대로 된 눈을 가지지 않고 단순한 결절 구조만을 가진다. 진화론에서는 당연히 이들의 눈을 흔적기관이라고 본다. 더 이상 시력이 필요하지 않은 환경에서 이들의 조상들이 어느 시점엔가 눈이 퇴화되면서 없어지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그것을 입증하는 화석 등의 증거가 있어서 나온 것이 아니라 아마도 그랬을 것이라는 추정의 스토리일 뿐이다. 그리고 그 추정은 장님 도롱뇽과 동굴어가 처음부터 그 환경에서 살았던 것이 아니라 그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진화했을 것이라는 진화론적 상상에서 나온 추정이다. 그렇다면 그 추정의 논리적 타당성은 인정할만한 것일까?

무엇보다도 ‘퇴화도 진화의 한 형태’이라는 논리 자체에 문제가 있다. 동물에게 시력이란 먹잇감을 사냥할 수 있게 해주고 적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도록 해주는 적자생존의 강력한 도구라 할 수 있다. 진화론에서도 동물이 시력을 갖게 되면서 폭발적으로 진화하게 되었다고 말할 만큼 진화를 일으킨 매우 중요한 원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동물에 있어서 시력은 그렇게 중요한 기능이기 때문에 시력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아무리 특수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진화에 역행하는 반진화적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시력을 상실하는 것은 단순한 퇴화 그 이상의 반진화적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장님 도롱뇽과 동굴어가 진화의 결과물들이라면 그들은 퇴화된 눈이 아니라 미약한 빛 가운데에서도 시력을 발휘할 수 있는 더 발달된 눈을 가져야 할 것이다. 빛이 매우 약하니 볼 필요가 없다고 포기해버릴 만큼 시력이라는 것은 동물에게 있으나 마나 한 기능이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장님 도롱뇽과 동굴어의 눈을 두고 기능을 잃어버린 흔적기관이라고 말하는 것은 타당성이 떨어진다. 결국 이들은 이들이 사는 환경에 가장 적합하도록 설계된 존재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한 설명이라 할 수 있다. 이들에게 진화의 개념을 무리하게 적용하다보니 ‘퇴화도 진화의 한 방법’이라는 궤변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화를 위해서 퇴화도 무릅쓴다’는 식의 그러한 주장은 마치 논리적 모순을 무릅써서라도 진화를 지켜내고자 하는 진화론의 몸부림처럼 보일 뿐이다.

충수돌기, 더 이상 진화의 증거로 타당하지 않다.

충수돌기에 대한 진화론적 주장이 갖고 있는 논리적 문제점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충수돌기는 식성의 변화로 인해 섬유소를 소화시키는 미생물들이 서식할 만큼 충분하게 긴 소화관이 없어지며 기능을 잃어버린 것”이라는 주장은, 다른 소화기관의 경우에는 적용될 수 없는 논리를 특별히 충수돌기에만 적용한 것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충수돌기에 대해 그렇게 말한다면 섬유소 소화 기능을 가진 다른 기관들은 어떤가? 즉, 소, 사슴, 기린과 같은 반추동물의 소화기관이 다른 동물에서는 어떤 흔적으로 남아있는지에 대한 설명도 필요하게 된다. 소가 가진 제1위~제4위라는 4개로 나누어진 위장 구조, 그리고 반추위인 제1위의 섬유소 소화 기능은 왜 다른 동물에서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은 것일까? 그 반추위안에 공생하던 1,000조가 넘는 미생물들은 진화과정에서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충수돌기가 섬유소 소화 기능을 잃어버린 흔적기관이라고 말하려면, 되새김하지 않는 포유동물들의 위장에 되새김 기관들이 어떤 흔적으로 남아있는지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동일한 진화 계통 상의 다른 동물에서 반추위의 흔적이나 섬유소 분해 미생물들을 위한 서식처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반추동물들이 그들만의 독특한 위장 구조를 보여주는 것처럼, 되새김하지 않는 동물들도 그들 고유의 소화관 구조를 보여줄 뿐이다. 반추동물에서 되새김 작용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그 수많은 공생 미생물들은 되새김하지 않는 동물의 어떤 소화기관에서도 서식할 수 없고 서식하지도 않는다. 그 두 부류의 동물들은 소화기관에 있어서 엄연한 구조적, 기능적 차별성을 보여줄 뿐 상호 간에 어떤 진화적 상관관계도 보여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정작 섬유소 소화 기능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반추위에 대해서는 그 흔적이라 할만한 어떤 기관도 관찰된 바 없고 그런 주장 또한 없다. 하지만 진화론 학자들은 오직 충수돌기에 대해서만 흔적기관이라는 논리를 적용시킨다. 이런 무리한 주장은 앞에서 소개한 것처럼 충수돌기 고유의 기능들이 발견되면서 과학적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고 있다. 이는 어떤 타당한 증거도 없는 갖다 붙이기식 설명에 불과하며, 충수돌기를 진화 개념의 프레임 안에서 설명하고야 말겠다는 무신론적 고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진화의 과정에서 기능을 잃고 퇴화되었다는 주장 자체가 갖는 논리적 모순의 문제는 새로운 기능을 찾는 과정이라고 포장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편, 충수돌기의 흔적기관 가설에 동의하지 않는 다른 진화론 학자들은 충수돌기를 수렴진화의 결과물이라 말한다. 하지만 이 역시 공통 조상으로부터의 진화로 잘 설명되지 않는 데에 대한 땜질식 임기응변적인 가설이 아닐 수 없다. “진화 계통이 다른 각 동물에서 최소한 32번 이상 독립적으로 진화함으로써 유사하게 나타난 것이다”라는 식의 주장은 원인과 결과를 따지는 과학적 추론이라기보다는 우연이 만들어내는 연속적인 기적에 기대는 비과학적인 상상에 가깝다. 결국 충수돌기에 대한 진화론의 주장, 즉 공통 조상의 흔적이라거나 또는 수렴진화의 결과라고 보는 그 어느 가설도 정당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그 가설들은 진화의 관점만을 배타적으로 강요하는 무신론적 억지라고 밖에는 달리 내릴 평가가 없다.

그렇다면 충수돌기는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 어떤 타당한 설명이 가능할까? 진화의 개념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고 설계의 관점에서 충수돌기를 살펴보면 얼마든지 논리적으로 타당한 설명이 가능해진다. 우선 반추위는 그 독특한 특징들로 미루어볼 때 반추동물에게 되새김을 하도록 주어진 설계 특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 반추동물에게는 되새김이 가능한 위 구조는 물론 섬유소를 분해해주는 엄청난 미생물들이 서식하는 소화계 시스템으로 설계되어 부여되었기에 반추동물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충수돌기는 장 면역 기능의 유지를 위해 유익한 세균들의 안전한 서식처이자 공급처로서 처음부터 존재하게 된 설계된 기관으로 보는 것이 논리적으로 지극히 타당하다. 흔적기관 또는 수십 차례의 독립적 진화의 결과물이라는 진화론적 설명과 비교할 때, 오히려 관찰된 결과를 해석함에 있어서의 논리적 타당성은 유신론적인 설계 관점의 설명이 훨씬 더 견고함을 알 수 있다.

공통 조상인가, 공통 설계인가

생물의 세계에는 수많은 유사한 특징들이 존재한다. 그 유사성들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 유사한 특징들이 그렇게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들이 어떤 공통된 원인으로부터 나왔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 공통된 원인의 본성이 무엇인지가 가장 중요한 질문이 된다. 그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 진화론에서는 당연히 공통 조상의 개념을 제시한다. 무생명에서 생명이 스스로 발생하였고 모든 생물은 조상에서 자손으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물질적 발생에 의해 나온 것이라 본다. 이러한 유물론적 관점에서는 유사성이란 공통 조상이 자손들에게 물려준 공통된 특징들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 무신론적 유물론의 안경을 벗고 본다면 그 유사성은 한 설계자의 설계도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특징이라는 새로운 설명이 가능해진다. 이른바 유신론적 관점에서 출발하는 공통 설계의 개념이다.

공통 조상? 공통 설계? 아니면 그 둘의 조합? 이 중에 맞는 답은 무엇일까? 이는 과학적 사실 여부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 무신론과 유신론 중 어떤 세계관을 가졌는가라는 질문이다. 만일 설계자를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자라면, 생물계의 모든 유사성들은 공통 조상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은 공통 조상 개념의 범위에 대한 것이다. 즉, 모든 생물의 공통 조상을 말하는지 아니면 특정한 그룹의 생물들에 대한 조상을 말하는지를 구분해야 한다. 찰스 다윈의 주장을 근간으로 하는 다윈주의 진화론에서는 궁극적인 최초의 공통 조상, 이른바 마지막 보편적 공통 조상(last universal common ancestor, LUCA)에서 시작되어 점진적으로 모든 생물이 발생했다고 본다. 하나의 큰 나무로 그린다면, LUCA가 나무의 가장 밑동에 있고 나무줄기와 가지가 계속 나누어지면서 다양한 생물들이 생겨나는 모양이 된다(그림 2).

 그러나 공통 조상의 개념은 LUCA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좁은 의미에서의 공통 조상은 특정한 생물 그룹들에 대한 원형을 가리킬 수도 있다. 예를 들면 개에는 다양한 품종들이 있지만 그 모든 개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형질을 물려준 개들의 공통 조상이 있을 것이다. 세퍼드, 불독, 푸들.. 무척 다양한 품종의 개들이 있지만 이들은 모두 Canis lupus familiaris 라는 학명을 가진 같은 종이다. (이렇게 같은 종 내에 다양한 품종이 존재하는 현상을 진화론에서는 소진화라고 부르고 창조론에서는 변이라고 부른다. 종의 경계를 넘어선 변화를 주장하는 대진화와는 다른 것이며, 진화론-창조론 간의 논쟁은 소진화가 아닌 대진화에 대한 것임을 주의해야 한다.) 이 다양한 품종의 개들의 공통 조상은 Canis lupus familiaris 의 원형에 해당하는 조상(?)인 셈이다. 이런 범위의 공통 조상은 실제 관찰 가능한 과학적 사실이며, 무신론적 관점에서만 사용하는 개념이 아니다. 사람 즉 Homo sapiens 라는 종에도 흑인, 백인, 황인 등 여러 인종이 있는 것처럼 같은 종 내에는 다양한 변이 형태의 생물들이 존재하고 이들이 해당 종의 원형에서 파생된 공통적인 형질들을 함께 공유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공통 조상이라 하더라도 그 개념이 LUCA를 말하는 것이라면 무신론적 진화론의 주장이겠고, 종 수준의 생물 그룹에 대한 공통 조상을 의미한다면 세계관과는 무관한 과학적 사실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진화론에서 통상적으로 공통 조상이라고 말할 때에는 그 개념의 범위에 대한 구분이 없이 획일적으로 제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공통 조상 개념을 후자의 경우로 말한다면, 생물들 간의 관계를 그린 그림은 LUCA에서 뻗어나온 한 그루의 큰 나무가 아니라 수많은 작은 나무들이 나란히 심어져있는 과수원의 모양으로 그려질 것이다. 이 경우에는 생물의 유사성을 공통 설계와 공통 조상의 개념을 함께 적용하여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공통 조상의 개념이 모든 생물에 대한 보편적 공통 조상(universal common ancestor)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생물의 유사성에 대한 설명 안에 공통 설계와 공통 조상의 개념은 공존할 수 없게 된다. (이 글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한 공통 조상이라는 표현은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보편적 공통 조상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생물들이 보여주는 유사성을 공통 조상과 공통 설계 중 어느 쪽 개념이 더 잘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설명을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설명의 출발점이 서로 다를 뿐 둘 다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있는 만큼 어느 것은 옳고 어느 것은 틀렸다고 증명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공통 설계 개념만으로도 생물의 유사성을 얼마든지 논리적으로 설명해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 유사성들은 공통 조상 개념으로는 전혀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기도 하다. 우리가 사용하는 여러 기계 장치들을 예로 들어보자. 스마트폰과 태블릿 PC와 노트북 PC 등등, 많은 점에서 서로 유사성을 가지고 동일한 원리에 의해 작동하는 전자기기들은 어떤 공통 조상으로부터 유사성을 물려받으며 존재하게 된 것들이 아니다. 그들 각각은 각각의 필요와 목적에 따라 별도로 설계되고 조립된 실물들이다. 설계상의 필요에 따라 화면의 크기, 메모리와 CPU의 품질 등 차별성을 둔 부품들이 조립되어 만들어지는 설계 작품들인 것이다. 수많은 자동차들은 어떤가? 조금씩 모양과 성능이 다르지만 기본적으로는 유사한 모양과 기능을 가진다. 오래된 자동차와 새 모델의 자동차는 구조와 기능면에서 공통점이 많지만 조상과 자손의 관계가 아니라 각각 별도로 설계되어 만들어진 것들이다. 자동차는 땅 위를 빠르게 이동하기 위해 바퀴를 갖추고 있고, 비행기는 땅을 달려서 날아오르기 위해 바퀴와 날개를 갖추었다. 비행기가 자동차보다 더 복잡하고 날 수 있는 기능이 추가되었다고 해서 비행기가 자동차의 조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각각의 존재 목적과 필요에 따라 다른 설계 특성을 갖지만, 둘 다 인간에 의해 설계됨으로써 기본적으로 공통점과 유사성을 가지는 공통 설계의 작품들인 것이다.

위와 같은 간단한 예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한 설계자로부터 나온 설계 유형들은 당연히 유사성을 가지게 된다. 설계자가 구상하는 것이 다양한 구성원들의 상호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체계화된 조직이라면 그 조직을 구성하는 구성원들은 공통적인 설계 요소들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다양한 생물들로 이루어진 생태계를 예로 든다면, 박테리아에서 식물과 동물에 이르기까지 생태계의 모든 구성원들은 단백질, 지질, 탄수화물, 핵산이라는 생체분자들로 이루어진 세포라는 생명 단위로 되어있다는 점에서 기본적인 설계 요소가 동일하다. 만일 동물의 먹이 즉 에너지원이 되는 식물이 쇳조각이나 무기물 덩어리와 같은 이질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생태계의 일원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렇듯 생태계를 이루는 구성원들은 기본적으로는 동일한 설계 요소들로 되어있다. 또한 생물들의 서식 환경이 비슷하면 그에 맞는 유사성들이 나타날 수 있고, 각 고유의 생육 방식 등 필요에 맞추어 최적의 상태로 설계되어 각각의 특징적인 설계 특성들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설계 관점은 설계자에 초점을 두고 생각해보아도 그 타당성을 확인할 수 있다. 설계자가 존재 방식이 비슷한 여러 유형들을 설계할 때는, 하나의 공통적인 기본 개념으로 시작하고 설계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각 객체의 용도에 따라 마무리 단계에서 차별성을 두게 될 것이다. 설계자로서는 가능한 한 이미 존재하는 설계 요소들을 적용하여 설계하는 것이 당연하다. 공통적인 개념이나 구상도 없이 서로 무관한 것들을 이질적으로 뒤섞어놓는 것은 설계가 아니라 쓸모없는 혼돈의 잡동사니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인간의 지적 활동에 의한 설계가 이러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의 이해를 확장시켜 생물체들을 설계한 설계자의 지적 활동에 대해서도 어떻게 작동한 것인지 통찰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들을 설계한 그 설계자의 지적 능력에 대해 피조물 된 인간으로서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모든 생물에서 나타나는 명백한 유사성은 한 설계자에 의한 공통의 설계 특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과, 또한 그 설계자는 만물의 존재에 대한 근원을 제공할 만큼의 절대적인 지혜자임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이다.

제작

글 : 현창기 | 한동대학교 생명과학부 교수 / 제작 : GODpia
2018. 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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