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희 교수님의 서재는 ‘노래’다

인성희 교수님의 서재는 ‘노래’다.

저는 노래를 하며 항상 꿈을 꿔요.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고 노래를 통해 사람들이 치유받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도 있기를 기도해요. 연습실에서 찬양을 부르다 저에게 먼저 감동이 몰려올 때가 있어요. 연습하면서 제가 먼저 감동받았으면 다 된 거예요. 무대에서 그 감동을 전달할 수가 있거든요. 찬양을 부를 때 그렇게 성령님께서 터치해주시는 부분이 있어서 감사해요.
제가 부른 찬양을 들으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제가 연습하며 뭉클했던 감격이 잘 전달될 수도 있기를 기도하죠. 그래서 무대이든 연습실이든 노래할 수 있는 곳이라면 꿈과 선율과 현실이 어우러져 제가 넓어지고 깊어지는 서재와 같은 곳이에요.

어린 시절부터 함께 했던 음악

제가 4대째 크리스천인데요. 할머니가 이화여전 나오시고 기독청년회장을 하셨어요. 할머니가 영어도 하실 줄 알고 외국인 선교사에게 우리나라 말과 음식도 가르쳐 주셨지요. 그런 할머니가 저를 돌봐주시면서 항상 클래식 음악을 틀어 놓으셨다고 해요. 어릴 적부터 음악과 가깝게 지냈지요.
어릴 적에는 발레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게 꿈이었어요. 그런데 어머니도 학교 선생님도 반대를 하셨죠. 선생님께서 성악을 하라고 권유를 하셨어요. 생각해 보니 성악은 가사가 있어서 하나님을 찬양하기가 더 좋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성악을 했어요. 서울에서 음악 선생님이 새로 오셨는데 칠판에 전국학생음악 경연 대회 광고를 적어 주셨어요. 친구가 옆에서 “너 한번 나가봐” 하는 거예요. “그런 거는 배운 사람이나 나가는 거야.”했더니 친구가 이대 성악과를 다닌 분을 소개해줬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 여덟 번 레슨을 받고 대회에 나갔어요. 한국 가곡 하나, 이태리 가곡 하나를 불렀는데 전국에서 2등을 했죠.

갑작스럽게 떠난 독일 유학

성악으로 이대에 수석 입학을 하고 수석으로 졸업했는데 유학대신 결혼을 선택했어요. 유학을 권유하셨던 교수님께서 많이 아쉬워하셨죠. 대학원을 졸업하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교회 지휘자로 일하다 갑자기 독일로 유학을 가게 됐어요. 남편이 독일로 유학을 가게 되었죠. 마음에 유학에 대한 소원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이 모든 길을 예비해주셨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큰 아이를 낳자마자 독일로 가서 어학 코스를 했어요. 아이를 친정 엄마에게 맡기고 갔죠. 1년 뒤 아이를 독일로 데리고 와서 굉장히 고생을 했어요. 아이가 밤마다 할머니를 찾았어요. 저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학교에 들어가서 아팠어요. 학교에서 음악 코치와 아리아를 부르던 중에 갑자기 쓰러졌죠. 노래를 한 마디도 못할 정도로 아팠어요. 집이 3층이었는데 계단을 올라갈 때도 90세가 넘는 할머니 같이 호흡하기조차 어려웠죠. 회중 찬송을 할 때도 찬양을 못 부르고 간신히 서 있기만 했어요. 모든 근육이 다 약해진 상태였어요.
독일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는데 갑상선에 혹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의사는 혹이 그리 크진 않으니 커피 많이 마시지 말고 산책하고 편안하게 지내라는 말만 했죠. 봄에 검사를 받았는데 가을이 되니 죽을 지경이 된 거예요. 바로 치료했으면 나았을 텐데 갑상선 항진증을 그냥 두면서 점점 악화되어서 앉아있지도 못할 정도가 되었죠. 당시 망막이 박리가 되고 발톱에도 염증이 생겨서 발톱도 빼고 그렇게 온 몸이 아팠어요.




독일 심사위원들이 ‘브라보’를 외친 독창회

그렇게 6개월 동안 입도 뻥긋 못했어요. 노래를 못할 정도로 몸이 너무 안 좋으니까 이론으로 바꿔야 하나 그런 생각도 했었죠. 그런데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성악을 선택했으니 하나님이 깨끗이 낫게 해주실거야’하는 믿음이 생기더군요. 쉬는 동안 혹시 나에게 있는 나쁜 습관들을 하나님이 다 없애주시고 다시 빚어 주시듯이 더 좋아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기도했어요. 몸이 조금씩 회복되고 ‘이 학위는 안 돼도 괜찮아’하는 마음으로 다시 천천히 시작했죠.
박사 과정을 하려면 4번의 독창회를 해야 하거든요. 제가 있을 때부터 법이 바뀌어서 한번 독창회 할 때마다 모든 심사위원이 만장일치로 합격을 해야만 그다음 독창회로 넘어갈 수 있었어요. 감사하게도 세 번의 독창회를 마치고 마지막 독창회에서는 심사위원분들이 일어서서 브라보를 외쳐 주셨어요. 심사위원분들이 “감동이었다.” “최고였다”라는 말씀을 많이 해주셨어요. 한편으로는 포기하려 했던 학위였는데 그런 결과에 놀라고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했지요. 그 후 독일 중부를 돌며 많은 공연을 했어요. 어느 독일 교회에서는 커튼 콜을 대여섯 번을 받은 적도 있었어요.
저는 어렸을 적부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에 대해 관심이 많았어요. 단어의 뜻을 찾아 해석해도 와닿지가 않으면 왜 이렇게 얘기했을까 의문을 갖기도 했고요. 이태리 가곡과 같은 음악을 이해해서 노래하고 싶었거든요. 어떻게 하면 마음을 다해서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아프고 난 뒤에는 그런 것들이 조금씩 노래로 표현되기 시작했죠.
아팠던 시간을 ‘아픔’이라는 한 단어로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을 견디는 게 그렇게 쉬운 건 아니잖아요. 아플 때는 희망이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거든요. 그런데 그런 고뇌와 아픔을 이기고 난 후의 노래는 희망과 감사의 마음이 녹아 들어서 더 많은 것을 노래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어요.

한국으로 돌아온 뒤 닥친 시련

독일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정말 활발하게 활동을 했어요. 상도 받고 이대, 연대, 추계대에서 강의도 하면서 오케스트라와 전국으로 다니고 열린음악회 같은 방송도 많이 했죠. 그러던 중에 개인적으로 힘든 상황이 닥쳤어요. 그때 제가 호흡을 다 잊었어요. 진이 다 빠졌다고 할까요. 갑상선은 문제가 없다고 하는데 저는 뼛속까지 시린 거예요. 호흡이 안 되고 완전히 바닥으로 내려갔어요.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노래를 다시는 못 할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하나님이 세우시면 다시 할 수도 있어. 어떻게 될지 결과는 모르겠지만 소망을 가지고 연습을 해보자. 다시 시작해 보는 거야.’ 그때가 마흔이었어요. 그때 중증 장애아들 기금 마련을 위한 자선음악회를 많이 했어요.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땀을 뻘뻘 흘리면서 노래를 불렀죠. 그 당시 감기도 잘 걸렸어요. 감기 걸린 상태에서 교회 특송도 많이 했었죠. 그런데 이상한 게 저는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제 노래를 듣는 분들은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하는 거예요.
전에는 “고난이 유익이다”라는 말을 싫어했어요(웃음). 힘들 때는 그 무엇도 위로가 안 되고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오뚝이같이 일어나서 견딘다고 하지만 그래도 힘들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에게 낙천적인 성격을 주셔서 그런 상황에서도 불면증이 안 왔어요. 성경을 읽으면 잠이 잘 오더라고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수면제를 주시는군요.”하면서 잘 잤죠. 괴롭고 힘들 때는 스트레스를 풀려고 뭘 할까 하는 생각을 안 하고 노래하고, 아이들 하고 지내며 매일의 삶에서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했어요.

행복과 배려를 가르쳐 준 책

제자훈련과 사역훈련을 하면서 필독서를 읽고 삶이 많이 바뀌었어요. 책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요. 얼마 전에 읽은 책 중에서 젊은 학생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책이 있어요. [꾸베씨의 행복여행]인데요. 정신과 의사가 행복을 찾아 여행을 다녀와요. 그 후에 불행하다고 오는 환자들에게 카드를 주지요. 카드에 이런 말이 적혀 있어요.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카드에 적힌 구절처럼 아무도 듣고 있는 사람이 없다 할지라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래를 하라고 학생들에게 얘기해주고 싶어요.
또 한 권의 책은 한상복의 [배려]에요. 배려하면 이웃을 먼저 생각하고 남에게 베푸는 배려를 생각하잖아요. 이 책에 나를 위한 배려가 적혀 있더라고요. “스스로를 위한 배려. 솔직하라! 너와 나를 위한 배려, 상대방의 관점으로 보라! 모두를 위한 배려, 통찰력을 가져라!” 이런 문장이 적혀있어요. 너와 나 모두를 위한 다른 차원의 배려가 마음에 와 닿아서 책을 읽으며 좋았어요.

학생들을 가르치며 얻는 기쁨

1999년도에 9회째 독창회를 했는데 마음으로는 1회 독창회로 생각했어요. 첫 독창회라 생각하고 발전하는 과정을 기록하자 해서 실황을 CD로 만들었죠. 내가 이 땅에 없을 때 CD를 아이들에게 물려주자 했어요. 그리고 2000년도에 교회에서 사역훈련을 마치고 백석대 교수로 들어가게 되었죠. 학교에서 테크닉만 배우려고 하는 학생들을 만나기도 해요. 저는 학생들이 노래라는 범주를 뛰어넘어 삶과 희망과 치유를 줄 수 있는 전인적인 음악인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제가 가진 노래와 무대에 대한 태도뿐 아니라 삶에서 느낀 것들을 많이 가르쳐 주려고 해요.
제자 중에서 뮤지컬의 프리마돈나 신영숙이 있어요. 아주 열심히 해서 뮤지컬 ‘명성황후’의 주연을 하고, ‘레베카’와 ‘웃는 남자’의 주연을 했어요. 너무 기쁘고 감사하지요.

비전과 기도제목

제가 성경대학을 하면서 말씀을 제 자신에게 적용하는 연습을 많이 하게 됐어요.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가 저에게 적용이 되더군요. 현실적으로 볼 때는 불가능한데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못할 게 없구나. 나이가 문제가 아니구나. 말씀을 읽으면서 소망을 갖게 되었어요. 나이와 상관없이 꿈을 가지고 성악가로서 열심히 찬양하고 노력하고 있어요.
세월이 가도 쓰임 받고 영역이 넓어져서 성악과 찬양의 삶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기도하며 소망해요. 무엇보다 몸이 건강해야 그럴 수 있겠네요. 저는 나이가 들고 노화는 되겠지만 점점 더 노래가 좋아지는 걸 느끼며 감사해요. 해외에 있는 두 아들의 믿음과 성령 충만함을 위해서도 기도해요.



- 인터뷰 진행&정리 : 이음 작가
- 사진 : 이요셉 작가
- 인터뷰 장소 : 역삼동 스튜디오
- 기획.제작 : 사랑의교회 인터넷사역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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