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아 작가의 서재는 ‘충전기’다

시나리오 작가 유영아 씨의 서재는 “충전기”다.

드라마 회사에서 마련해 준 작업실에 제일 먼저 가지고 들어간 게 성경책과 필사 노트, <매일성경>이었어요. 회의하고 드라마, 영화 일속에 빠져있으면 금방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제 생각대로 결정해버릴 때가 있거든요. 그래서 작업실에 오면 제일 먼저 필사를 하고, <매일성경>을 읽으려고 해요. 그러면 하나님의 기준 음으로 제가 조금씩 튜닝이 돼요. 저에게 작업실은 일을 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서재처럼 말씀도 읽고, 책도 읽고 영화도 보면서 충전을 하는 곳이기도 해요.

제가 아직 마흔다섯이지만 태어날 때부터 사연이 많았던 거 같아요. 그런 걸 가만히 두면 한이고 슬픔이고 비애가 되었을 텐데 다행히 상상력과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뇌 구조를 하나님께서 주셨어요. 그런 걸 이야기로 잘 풀어내서 살아보렴 하고 하나님께서 이야기를 만드는 달란트를 주신 것 같아요.

계속 되는 실패 끝에 붙잡은 성경

대학교에서 중국어 학과를 갔는데 글을 계속 쓰게 되더라고요. IMF로 집이 힘들어지기 전에 영어 학원비로 몰래 시나리오 학원을 다녔어요. 2009년에 개봉한 <웨딩드레스>가 제 첫 작품이에요. 작가로 데뷔하기까지 12년 정도가 걸렸네요.

일찍 결혼해서 첫째 딸을 낳고 힘든 시간을 보내며 글만 쓸 수 없었던 시간도 있었어요. 아이와 둘이 살아야 하니까 학습지 교사도 하고, 작은 학원도 운영했죠. 밤늦게 일 끝내고 와서 아이를 재우고 아무리 힘들어도 매일 밤 11시부터 12시 반까지 글을 쓰고 잤어요.
삶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반드시 작가가 되어야겠다는 오기가 생겨서 공모전을 다시 준비했어요. 그런데 계속 떨어지는 거예요. 이번에는 정말 될 거라고 생각했던 공모전에서 떨어지고 하나님께 따지기도 했죠.

그러던 어느 날 여름 수련회에서 솔로몬의 천 번제에 대한 설교를 들었어요. 1000번째 끝날 때까지 작가가 되어있지 않으면 그만두겠다는 각오로 2004년부터 <매일성경>으로 천 번제를 시작했어요. 천 일 동안 매일 큐티하고, 기도하면서 천 원씩 헌금했죠. 그때는 천 원도 저에게 컸던 시절이었어요. 그런데 천 번제를 시작한 지 365일이 되기도 전에, 작은 공모전에서 가작을 타면서 조금씩 일을 하게 됐어요.
아직도 천 번제를 하고 있어요. 드라마를 위해서 천 번제를 하고, 끝나면 첫째 딸을 위해서 천 번제를 하고 저희 가정을 위해 천 번제를 드리다 지금의 신랑을 만나고 둘째 아이를 낳게 되었죠. 지금은 남편과 함께 하는 ‘글뫼 회사’를 위해서 천 번제를 하고 있어요.

가장 깊은 아픔이 만들어내는 클라이맥스

영화 <파파로티>에 제가 아끼는 장면이 있어요. 선생님 역을 맡은 한석규 씨가 잔뜩 졸아서 조폭 두목을 찾아가서 이런 대사를 해요. “장호 풀어주십시오. 제 손모가지는 안 되고… 발모가지라도 끊으십시오.”
피아노를 연주해서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자신의 손목 말고 발목을 끊고 장호를 내놓으라고 하는 거죠. 조폭 두목이 거기서 흔들리거든요. 그런 대사를 쓸 수 있었던 게 이 사람 안에 있는 결핍 또는 미련이었던 거 같아요. 이 캐릭터의 모델이 된 분이 실존하시는 분이거든요. 그분이 독일에서 첫 주연 배우를 하는 무대 전에 목에 종양이 생겨서 한국에 돌아오셨어요. 굉장히 괴로운 시간을 보내셨죠. 영화 속 인물과 다르게, 이분은 교회성가대 지휘도 하시고, 하나님 일을 열심히 하시며 기쁘게 살아가시는데 마음 깊이 그런 안타까움이 있으신 거예요. 건달로 살지만, 신이 주신 목소리를 가진 장호란 학생을 봤을 때 상진이란 선생님도 처음에는 질투가 났겠죠. 하지만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니 이 친구를 건달이 아닌 음악 하는 아이로 만들어야겠다는 결단을 한 것이죠.
장호란 캐릭터도 겉으로 보면 건달이지만 가장 깊은 곳에 외로움이 있거든요. 할머니랑 둘이 살다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대화를 할 상대가 없으니 3일 동안 목소리를 낸 적이 없다는 대사를 해요. 조폭의 조직 생활이 여러 명이 함께 있으니까 그게 좋았던 거죠. 결국 인물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이 이야기의 클라이맥스와 만나요.

제 인생의 클라이맥스는 영화 <7번 방의 선물>이 개봉했을 때였어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영화였는데 스코어가 엄청 터지는 거예요. 영화가 잘 된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을 안 만나려고 했어요. 그럴 때 사람이 실수를 하잖아요. 그때 유일하게 밥 먹은 팀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죠. 저에게 ‘7번 방의 선물’은 신랑이에요. 지금 준비 중인 영화 <82년생 김지영>도 그렇고 남편을 만나고 둘째를 낳고 쓴 작품들의 정서가 좀 달라진 거 같아요. ‘여유가 생겼구나’란 생각이 들어요.




멋있는 남자란 누구일까 생각하며 쓴 드라마

드라마 <남자친구>의 송혜교 씨가 맡은 여자 캐릭터는 예전부터 워낙 쓰고 싶었던 캐릭터였어요. 그런데 남자 캐릭터가 계속 완성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다 어느 날 저희 교회 전도사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어요. 사실 교회에서 드리는 사역비가 많지 않잖아요. 바쁘기도 하고 아무 아르바이트나 못하고요. 일을 하며 공부도 하시면서 참 열심히 사세요. 원 플러스 원 양복 샀다고 좋아하시기도 하고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가진 것 없고 평범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 중심에 반듯한 가치관이 있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남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게 평범하고 가진 것 없지만 건강하고 반듯한 가치관을 가진 진혁이란 캐릭터가 만들어졌어요. 진혁이는 책과 문학과 가족의 사랑으로 반듯하게 자란 건강한 청년이죠. 박보검 씨도 이 캐릭터를 좋아해 줘서 다행이에요. 이번 드라마가 배우분들에게 민폐가 되지 않는 작품이었으면 좋겠어요. 시청자분들의 반응이 뜨거운데 실망시키지 않는 드라마가 되었으면 좋겠고요. 이런 생각에 초조해지기도 하는데 그냥 기도하고 있어요.

어두운 시간에 빛이 되어준 책

인생의 가장 힘든 시간을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를 읽으면서 버텨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극심한 우울증을 겪었던 것 같아요. 20대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시간이었죠.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내가 죽어야겠다는 험한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때 저를 잡아준 건 잠언 필사와 <토지>였어요. <토지>를 읽는 시간만큼은 다른 생각 안 하고 이야기에만 집중하게 되더라고요.
박경리 선생님은 작가로서도 굉장히 존경하는 분이세요. <토지>에는 많은 인물들이 나오거든요. 영화 시나리오와는 달리 드라마는 1부에 나온 캐릭터가 16부까지 일관성을 가지고 변함없이 가야 해요. 그게 어렵거든요. 그런데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를 보면 어떻게 그 많은 캐릭터를 끝까지 일관성 있게 이어갈 수 있을까 감탄하게 돼요.

얼마 전, 가지고 있던 책을 교회 카페에 다 기증했어요.
하지만 <매일성경>은 다 가지고 있어요. 10년 넘게 쓴 기록이 담겨있으니까요. <매일성경>을 묵상하면서 ‘어제 내가 왜 그랬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지난번에 있었던 일은 그래서 그러신 거였구나.’ 하며 깨닫기도 해요. 오랜 시간 <매일성경>으로 묵상하며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거 같아요. 그전에는 ‘하나님은 나에게 왜 이러실까’하는 분노만 가득했거든요. <매일성경>을 읽다 보니 작가로 만들어주시고 가치관을 수정하게 하시고 신앙의 잘못된 부분도 고쳐주시고 격려도 해주시네요.

“길이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하니?”

저에게 영화라는 업계는 불모지였어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죠. 처음에는 사람을 의지하게 되더군요. 인맥 속에서 뭔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시간들이 있었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을 들더군요. ‘길이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하니?’ 하나님이 주신 생각에 많이 부끄러웠어요. 하나님께 죄송하기도 하고요. 성경을 읽다 이런 말씀을 발견하고는 더욱 선명하게 깨닫게 되었죠.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이사야 2장 22절)”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사야 55장 9절)”

그때부터 기다리는 마음으로 성경 필사를 시작했어요. 돌아보면 일이 안 된 것도 다행이었더라고요. 그 길로 갔으면 큰일 날 뻔했거든요. 그런 경험이 쌓이면서 기도하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구나, 일이 안 된 것도 기도 제목이 이뤄진 거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엔터테인먼트 쪽 일이 유난히 빛나 보여서 로망을 갖고 있는 청소년이나 청년들이 많아요. 이런 일을 하려면 “이런 것도 해봐야 해. 교회에 답이 있지 않아.” 이런 말은 가치가 없는 이야기라고 저는 확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이런 쪽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화려해 보이고, 내가 무엇이 되어 있는 것 같은 착시 현상을 일으키기도 해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만난다고 내가 무엇이 되어 있지는 않거든요. 내가 무엇이 되도록 하는 것은 나의 성실함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이죠.
저희 교회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오래 간직하고 있어요. 마차의 두 바퀴처럼 사람에게도 신앙력과 사회력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두 바퀴의 사이즈가 같아야 해요. 그래야 앞으로 가거든요. 하나라도 작으면 계속 원을 그리기만 하죠.

비전과 기도제목

구치소에서 <파파로티> 영화를 보고 자신도 성악을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열심히 살게 된 학생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영화 <형>을 보고 형에게 전화했다거나 형제들이 생각났다는 댓글을 보고 감사했죠. 바빠서 잊고 지냈던 중요한 것에 대해 ‘작은 환기’를 할 수 있는 작품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늘 있어요. 저도 글을 쓰면서 소중한 것에 대해 환기가 되거든요. 어두운 내용은 잘 쓰려고 하지 않아요. 못 쓰기도 하고요. 저는 그래도 답이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좀 더 선하게 살자. 좀 더 서로 들여다보며 살자.” 이런 의미를 담은 작품을 쓰고 싶어요.

요즘 교회에서 아프리카 사역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하세요. 저도 그곳에 ‘작은 학교가 지어지면 좋지 않을까, 교회가 없는 곳에 처마가 있는 교회가 세워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북한에 문이 열리면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그럼 어떤 것이 필요할까 이런 생각도 하고요. 그렇게 마음 주시는 곳들을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어요.

지금 준비하는 드라마도 잘 되었으면 좋겠고, 잘 된다고 해도 제가 의연했으면 좋겠어요. 교만이라는 게 그냥 슬쩍 들어오니까 더 위험하더라고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작가로 살아가면 좋겠어요.



- 인터뷰 진행&정리 : 이음 작가
- 사진 : 이요셉 작가
- 인터뷰 장소 : 홍대 글뫼 사무실
- 기획.제작 : 사랑의교회 인터넷사역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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